써놓기만 하고 방치된 ‘재해조사 의견서’… 매년 800건씩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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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아이클릭아트
공사장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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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부터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사업장의 이름과 업종, 규모, 생산 과정, 사고 원인이 낱낱이 국민에게 알려진다. ‘산재 근절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정부가 현재는 기업의 민감 정보 유출, 피의사실 공표 등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일종의 수사자료인 ‘재해조사 의견서’를 공표하기로 하면서다.
18일 정부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재해조사 의견서의 공개를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재해조사 의견서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중대재해 사고 원인을 조사한 결과를 담은 문서로, 사업장 정보부터 재해 노동자의 인적 사항, 사고 경위, 재발 방지 대책 등이 담긴다. 지금껏 노동계에서 지속적으로 공개를 요구해 온 사항이다. 현재 여대야소 국회 지형을 감안하면 하반기 법 개정을 통해 내년부터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공개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은 산업현장에서 비슷한 유형의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어서다. 고용부에 따르면 지난 5년(2020~204년)간 작성된 재해조사 의견서는 총 3833건에 이른다. 매년 800건가량의 중대재해가 발생했고 의견서가 작성된 셈이다. 지난 3년(2022~2024)간 사업주가 안전보건 조치를 위반해 사망한 노동자도 1831명에 달했다. 지난 17일에는 경남 김해 신축 공사장에서 40대 노동자가 11m 높이에서 추락해 숨진 사건도 있었다.
정부는 재해조사 의견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안전 설비 투자를 늘릴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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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관리 미비에 따른 재해로 확인된다면 해당 기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투자자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비판도 거세질 수 있다. 이종선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은 이미지 실추를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할 것”이라며 “구직자들에게도 중대재해가 잦은 기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서구에선 이미 시행 중이다. 미국의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일터에서 발생한 중대한 사고 중 과태료가 부과된 건에 대해 기업명, 주소, 사고 내용, 법 위반 내용 등을 공개한다. 영국 보건안전청(HSE)도 기업이 어떤 안전 규정을 위반했는지, 어떤 사고가 발생했는지 공개한다.
고용부는 최근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제재 방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지난 13일 건설사 영업정지·입찰 제한 요청 기준을 완화하고 사망 사고가 반복되면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또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해 과태료·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경찰도 산업재해·중대재해 수사 역량 강화를 위해 시도경찰청 형사기동대에 전담수사팀을 신설하기로 했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산업재해 전담 부서 신설을 위해 관계부처와 조직, 인력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재계는 이재명 정부의 ‘산재와의 전쟁’에 바짝 긴장하면서도 지나치게 ‘기업 때리기’로 흐르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특히 재해조사 의견서와 관련해서는 ‘공개 시기’를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차원에서 동종 업계나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범죄 유무가 확정되지 않은 내용인데 재해조사 의견서 자체를 원본 그대로 공개하면 특정 기업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줄 수 있어 부담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의 영업비밀 관련 내용은 제외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건설 관련 협회 관계자는 “‘건설업 면허 취소’와 ‘과징금 3%’ 논의가 나오는 상황에서 업체를 피의자로 규정하는 듯한 자료마저 공개하면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고 토로했다.
세종 유승혁·서울 하종훈·김기중·박상연 기자
2025-08-19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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