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리즈는 굵직한 사건현장을 누빈 베테랑 현장 기자인 유영규 기자의 생생한 경험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하는 서울신문의 특화 기사입니다. 서울신문은 기사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AI 음성을 이용해 ‘범죄는 흔적은 남긴다’ 연재물의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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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그녀가 죽였다’에서 공개한 엄 씨의 모습
MBC ‘그녀가 죽였다’에서 공개한 엄 씨의 모습
최근 서울 강북구 일대 모텔에서 20대 여성이 남성들에게 향정신성의약품(수면제)을 섞은 숙취해소제를 건네 잇따라 숨지게 한 이른바 ‘모텔 연쇄 사망 사건’이 발생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가해 여성은 “다투다 재우려고 약을 먹였을 뿐, 죽일 의도는 없었다”며 고의성을 부인하고 있으나, 약물 투여량을 점차 늘리는 등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호의를 가장하여 치명적인 약물을 건네고, 타인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은 이 잔혹한 수법. 이 끔찍한 기시감은 우리를 20여 년 전, 대한민국 전체를 경악게 했던 한 여성의 얼굴로 안내한다. 호의를 빙자한 약물 투여,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완벽한 연기, 그리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잔혹함까지. 바로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 엄 여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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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심사 출석하는 수유동 모텔 변사사건 피의자 서울 강북구 수유동 모텔에서 남성 2명을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20대 여성 A씨가 12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9일 강북구 수유동의 한 모텔에서 20대 남성 B씨에게 약물이 든 음료를 건네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2026.2.12 연합뉴스
영장심사 출석하는 수유동 모텔 변사사건 피의자
서울 강북구 수유동 모텔에서 남성 2명을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20대 여성 A씨가 12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9일 강북구 수유동의 한 모텔에서 20대 남성 B씨에게 약물이 든 음료를 건네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2026.2.12 연합뉴스
2005년 2월 17일 오전, 서울 강남경찰서 유치장.
철창 안에는 20대 여인이 넋이 나간 듯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170cm의 큰 키에 연예인을 연상케 하는 빼어난 미모,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명품 옷과 구두. 삭막한 유치장보다는 화려한 도심의 백화점이 더 어울릴 법한 그녀의 모습은 형사들에게조차 이질감을 주었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짐승처럼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벽을 긁는가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살려주세요!”를 외치며 픽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당직 형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녀를 둘러업고 인근 병원 응급실로 뛰어가기를 수차례. 하지만 돌아오는 의사의 소견은 매번 형사들을 허탈하게 했다.
“환자분 신체 활력 징후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의학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녀는 며칠 전 인근 화상(火傷) 전문 병원 계단에 휘발유를 뿌리고 방화를 시도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엄 모 씨(당시 29세)였다. 베테랑 형사들의 눈에 엄 씨의 행동은 의문투성이였다. 멀쩡한 20대 여성이 병원에 불을 지르려 한 동기도 불분명했고, 유치장에서 보여주는 발작 증세는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작위적이었다.
불안감을 느낀 형사가 그녀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남동생의 목소리는 예상 밖의 공포에 젖어 있었다.
“저… 형사님, 누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죽거나 다쳐요. 제발 조심하세요.”
이 한 마디가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희대의 연쇄 살인극, 일명 ‘엄 여인 사건’의 서막이었다.
가족을 제물로 삼은 ‘실명’의 저주남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엄 씨의 주변에는 5년 전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녀는 두 차례 결혼했으나 두 남편 모두 요절했다. 기이한 것은 사망 과정이 판박이처럼 똑같다는 점이었다. 건강하던 남편들이 갑자기 시력을 잃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집에는 원인 모를 불이 났다.
불행은 남편들에게서 멈추지 않았다. 남편들을 떠나보낸 뒤 고향인 강원도로 내려오자, 이번엔 혈육들이 타겟이 되었다. 어머니에 이어 오빠가 차례로 눈이 멀었고, 고향 집에도 화마가 덮쳤다. 심지어 엄 씨의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강 모 씨의 아파트에 불이나 강 씨의 남편이 사망하고 가족들이 화상을 입는 참극까지 벌어졌다.
형사들은 즉시 강원도로 급파되었다. 현장에서 마주한 진실은 참혹했다. 엄 씨의 어머니(당시 50대)와 오빠(당시 30대)는 실제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2003년 7월과 11월, 불과 6개월 시차를 두고 모자에게 급성 ‘안와 봉와직염’이라는 희귀 안질환이 찾아온 것이다.
“딸이 석류주스를 내왔는데 그걸 마시고는 정신이 몽롱해졌어요. 한참 자고 일어났는데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어머니의 진술)
“오랜만에 온 여동생과 술을 한잔했습니다. 기억이 끊겼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는데 앞이 안 보였습니다.” (오빠의 진술)
가족들은 ‘설마 딸이, 여동생이 그랬을까’라며 애써 의심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수사팀이 확보한 병원 기록과 보험 내역은 잔혹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죽은 두 남편과 실명한 가족들 앞으로는 어김없이 고액의 생명보험과 상해보험이 가입되어 있었다. 실명 후 첫 번째 남편은 뜨거운 기름에 얼굴을 데었고, 두 번째 남편은 배를 흉기에 찔리는 등 엽기적인 사고가 잇따랐다. 그때마다 엄 씨의 통장에는 거액의 보험금이 꽂혔다. 그렇게 챙긴 돈만 무려 5억 9천만 원에 달했다.
핀으로 눈을 찌른 ‘천사’, 그 잔혹한 수법경찰의 집요한 추궁 끝에 드러난 범행 수법은 상상을 초월했다. 엄 씨는 피해자들에게 수면제(라제팜 등)를 탄 음료를 먹여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잠든 사이, 옷핀이나 주사 바늘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눈동자를 직접 찌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눈을 찔린 피해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깨어나면, 그녀는 태연하게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빨개져 있었다”며 걱정하는 척 연기했다. 이후 상처에 세균이 감염되도록 유도하거나, 심지어 이물질을 넣어 실명을 확정 짓는 치밀함을 보였다. ‘안와 봉와직염’이라는 병명은 그녀가 만든 인위적인 상해의 결과물이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화려한 사치와 욕망을 채워줄 ‘현금인출기’에 불과했다.
법망을 비웃고 다시 시작된 사냥수사 초기, 엄 씨는 구속 위기에 처했으나 놀라운 연기력으로 법망을 빠져나갔다. 당시 “불치병을 앓는 세 살배기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며 눈물로 호소해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난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곧바로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알게 된 같은 병실 환자의 여자친구 A씨가 타겟이었다. 엄 씨는 A씨에게 “살 빠지는 약”이라며 수면제를 건넸고, 정신을 잃은 A씨의 눈에 핀을 찔러 실명시켰다. A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 엄 씨는 A씨의 신용카드를 훔쳐 아들의 병원비 900만 원을 결제하고 명품 쇼핑을 즐겼다.
심지어 그녀는 입원실에서 헌신적으로 아들을 돌보는 ‘천사표 엄마’ 연기를 하며 주변의 환심을 샀고, 이를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하며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사기를 쳤다. 병원 간호사들은 그녀를 “법 없이도 살 사람”,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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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엄 씨
2005년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엄 씨
모발은 기억한다: 체모 속에 숨겨진 마약의 흔적다시 체포된 엄 씨는 또다시 발작 연기를 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 앞에서 그녀는 서서히 무너졌다. 그녀는 4년간 마약에 취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심신미약을 인정받아 형량을 줄이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수사팀은 그녀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밀 감정을 의뢰했다. 범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특히 약물은 우리 몸의 기록 장치인 ‘체모’에 선명한 나이테를 새긴다.
일반적으로 히로뽕(메스암페타민)은 소변을 통해 배출되는데, 1.5~7일, 상습 복용자라도 최장 30일이면 흔적이 사라진다. 소변 검사는 ‘지금’의 상태만을 말해줄 뿐이다. 이러한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열쇠가 바로 머리카락과 체모다.
혈액을 타고 도는 마약 성분은 모근을 통해 모발에 흡수되어 단백질(케라틴)과 결합한다. 모발이 자라나면서 이 성분은 그대로 보존되는데, 머리카락이 한 달에 약 1cm 자란다고 가정할 때, 머리카락의 길이를 역추적하면 언제, 얼마나 투약했는지 시계열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겨드랑이털이나 음모는 머리카락보다 성장 속도가 느리고 휴지기(성장이 멈춰 있는 기간)가 길어, 같은 양의 마약을 복용했을 때 훨씬 고농도로 오랜 기간 성분이 검출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경찰은 엄 씨의 체모를 샅샅이 분석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몸에서 마약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그녀가 주장한 약물이 당시 마약류로 분류되지 않은 향정신성 의약품이었거나, 애초에 마약 중독 자체가 거짓말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대신 경찰은 그녀의 정신 감정을 의뢰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 테스트(PCL-R)에서 그녀는 40점 만점에 40점에 육박하는 점수를 받았다. 연쇄살인마 유영철조차 30점대 후반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는 감정과 죄책감이 완전히 거세된 ‘순도 100%의 사이코패스’였다. 마약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가족의 눈을 찌르고 웃음 지은 확신범이었던 것이다.
수사 결과 확인된 피해자만 사망 3명, 실명 및 부상 5명. 그 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여죄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녀가 훔친 것은 타인의 시력과 생명뿐만이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신뢰, 인간에 대한 믿음 자체를 파괴했다.
엄 씨는 2000년, 딸이 뇌진탕으로 사망하자 우울증에 걸려 마약에 손을 댔고, 환각을 위한 돈이 필요해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딸의 뇌진탕 사망조차 그녀의 소행일 수 있다는 의심이 제기되었다. 그녀의 모든 진술은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재판부는 그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피고인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족을 파괴하고, 돈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았다”며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엄 씨는 현재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정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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